우리나라에 최초로 바나나가 들어왔던 기록은 1952년 7월 16일 자로 상공부가 구상무역으로 사과를 수출하는 대신 바나나를 수입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. 실제로 수십년 전 바나나는 누구나 먹을 수 없던 고급 과일이었다. 1977년 4월 21일 자 한 신문에서는 수입 바나나 16개 한송이가 5500원에 거래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. 당시 200원 정도였던 자장면보다 바나나 한 개(343원) 값이 더 비쌌다는 얘기이다.
1960년대 사람들이 먹던 바나나는 지금의 우리가 즐겨먹는 바나나와는 다르다. 1900년대 중후반을 다룬 애니메이션 '검정고무신'에서 기영이가 먹은 바나나가 바로 '그로미셸(Gros Michel)' 품종이다. 전 세계 많은 바나나가 있지만 대부분은 딱딱한 씨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씨 없는 바나나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그로미셸이다. 지금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(Cavendish) 바나나보다 당도가 훨씬 높았고, 크기도 더 컸다. 더군다나 껍질이 지금 바나나보다 더 단단했기 때문에 운반이나 보관에도 유리했다. 그런데 우리는 기영이도 울고 갈 그로미셸 바나나를 오늘 날 자주 보이지 못하게 된 것일까?
1890년부터 바나나에 치명적인 병이 퍼지기 시작했다. 파나마병, 페루 파나마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이 전염병은 바나나 뿌리부터 푸사리움 곰팡이가 퍼지는 병으로 바나나 암이라 불릴 만큼 치명적이였다. 그로부터 1950년대 푸사리움 곰팡이가 창궐하면서 그로미셸 품종이 사라졌다.
병 하나로 품종하나가 사라지다니, 이러한 일이 어떻게 발생되는걸까? 알다시피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씨가 없다. 영양생식 방법, 즉 줄기를 심는 방법으로 번식한다. 일종의 꺾꽂이 방식으로 또 다른 바나나 나무를 만드는 것이다. 이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의 유전자를 섞여서 씨앗을 만드는 과정이 존재할 수 없다. 한 가지 품종만 재배하는 단일 품종 재배 방법은 동일한 맛과 동일한 품질의 바나나를 얻을 수 있다. 하지만 유전적인 다양성이 적기 때문에 전염병 같은 상황에 대응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그러한 일이 파나마병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. 전염병으로 인해 바나나 농장이 황폐화되자 기업들은 다급하게 파나마병에 강한 품종인 캐번디시 바나나를 심기 시작했고 지금의 바나나를 먹게 된 것이다.
그러나 최근에 또다시 신종 파나마병이 발생하면서 캐번디시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. 중국, 인도, 호주까지 빠르게 번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될 때가 오게 된 것이다. 어쩌면 10년 뒤에 우리는 캐번디시보다 당도가 떨어지는 세 번째 종의 바나나를 먹고 있을지도 모르며, 기영이가 눈물을 흘리며 먹은 바나나의 맛을 우리는 영영 맛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.
[Reference]
1) 농민신문 : [바나나 변천사] 1970년대 고급 수입과일 대명사… 국내산은… 이유식 재료로도 활용
2) 과일엔& : 그로미셸 바나나
3) 강자의 조건, 이주희 지음
4)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: [알아두면 쓸모 있는 환경이야기] 이 세상의 ‘바나나’가 사라진다? 멸종 위기의 바나나
5) 한국교육신문 : [상식 쏙 문해력 쑥] <53> 더 이상 맛있는 바나나를 못 먹을 수도 있다고
6) 조선비즈 : [IF] 전염병에 끄떡없는 야생 바나나 種 발견… 다섯 그루 남아 보존 시급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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